전 <한겨레> 기자 출신 이원재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월스트리트의 한국 투자가들은 오래전부터 한국의 국가컨셉을 '리틀 아메리카'로 가져갈 것을 조언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제가 의문을 품고 또 안타까워하는 것은 왜 이런 얘기가 한미 FTA 추진 선언 이전에 전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공론화가 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추천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책이지만, 아래 대목에 대해서는 당시 특별히 논란이 되거나 하지 않았던 기억이예요. 어떻게 이러면서 맨날 노무현 정권은 예측불허니, 독단적이니 하는 얘기가 한국의 학자와 언론인 집단에서 나올 수가 있는지... 우리 지식인층의 허약함에 다시 한번 놀라고 실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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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 국가의 브랜드, 아시아의 아메리카
아시아에 나라는 많다. 어떻게 하면 세계 경제의 커다란 에너지가 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를 두고 한국을 거쳐가도록 만들 수 있을까?
경영학에서는 새로운 시장에 신제품을 내놓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중요한 작업은 브랜드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아시아라는 성장하는 시장을 등에 업고 세계 각국, 모든 기업들 앞에 ‘한국’이라는 신상품을 내놓으려고 한다. 아시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장소로 우리나라를 포장해 팔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마케팅이 성공하면 한국인들에게 돌아오는 경제적 보상이 엄청날 것은 물론, 한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여느 선진국 못지않게 높아질 것이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브랜딩이 거의 끝난 상태다. 일본은 전자제품, 자동차 같은 물건을 잘 만드는 ‘장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떠오르는 아시아의 경제 대국’과 ‘값싼 노동력’이라는 이미지를 확고부동하게 점유하고 있다. 인도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신비로운 문화’라는 두 가지 임지를 갖고 있다.
그럼 한국에 가장 잘 맞는 브랜드 전략은 어떤 것일까? ‘한국’이란 브랜드는 오랫동안 세계 시장에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반도체와 자동차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 휴대전화를 잘 만드는 나라,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으로 대통령을 당선시킬 만큼 인터넷 사용이 활성화 된 나라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고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단일한 브랜드이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값싼 제조업’ 브랜드로는 이미 임금 수준이 낮은 중국에게 뒤진다. 하이테크 산업이 크게 발달했지만, 이걸로는 먼저 치고 나가 있는 일본과의 이미지 차별화가 쉽지 않다.
한국이 가질 수 있는, 허브 국가의 비전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파괴력 있는 브랜드는 ‘아시아의 따뜻한 미국’이다.
월스트리트의 진지한 한국투자자들은 한국의 미래를 얘기할 때 최선의 시나리오로 ‘리틀 아메리카’를 꼽는다. 리틀 아메리카 시나리오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이는 일본형 발전의 길은 이미 구조개혁을 마쳐가는 한국으로서는 돌아가기 힘든 길로 보인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일본의 길을 답습한느 것은 허브 국가를 지향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일부에서 저주처럼 거론하기도 하는 남미형의 길 역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게 통념이다.
아시아 유일의 소비 대국 후보, 한국
왜 미국인가? 덩치가 커졌으므면서도 역동성을 잃지 않고 항상 새로운 소비 패턴을 만들어내는 나라, 똑똑한 소비자가 새로운 물건을 찾아 왕성하게 소비를 하고, 따라서 세계의 모든 기업이 신상품을 개발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팔아보고 싶어하는 나라, 그래서 세계 경제의 허브 역할을 하면서 경제력을 유지하는 나라, 그게 바로 한국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시작한다면, 아마 미국에서 시작하는게 가장 좋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소비 유형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지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이 아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시작하는게 가장 좋겠다’고 여기도록 하려면,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작된 소비 유형이 중국 등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다는 인상을 주면 된다. 한국이 이런 측면에서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경제는 빠르다. 한국의 소비자는 세계 그 누구보다 새로운 것에 민감하다. 그리고 이른바 ‘떼거리 근성’이 있어 한번 유행을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들인다. 이런 역동적 시장은 세계적 상품을 여러 개 창출해 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생필품 신세를 벗고 패션과 엔터태인먼트로 한 단계 발돋움한 휴대전화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세계 최고 가입률을 자랑할 정도로 초고속 인터넷에 열공하는 한국 소비자들은 미국 라이코스를 인수한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일본에 진출해 선전 중인 NHN(네이버), 대만-중국의 한국산 온라인게임 열풍을 만들어냈다. 한국 소비 시장은 첨단 글로벌 기업의 인큐베이터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다.
외국인들에게 이런 한국 시장은 정말 놀라워 보인다. 미국 버클리대학 출신 역사학도 스콧 버거슨은 <발칙한 한국학>이라는 책에서 한국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국 중 하나지만 사람들은 열렬히 새것을 숭배한다. 출고된지 5년이 지난 차는 거의 볼 수 없고, 전통 한옥에 사는 사람들도 흔치 않다.”
나는 또 월가의 한 애널리스트와 나눴던 대화도 기억한다.
“왜 한국의 휴대전화 산업이 계속 성종하는거죠. 전화기는 한번 사면 10년은 계속 쓰는 내구재가 아닌가요? 저도 10년 전 100달러쯤 주고 산 휴대전화를 지금도 불편없이 쓰고 있는데요.”
1~2년에 한번씩 새로운 디자인으로 휴대전화를 바꾸는 한국의 중-고등학생들, 생일선물로 400달러가 넘는 휴대전화를 아무렇지않게 주고받는 한국 젊은이들의 얘기는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별세계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붐을 일으킨 카메라폰은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 소비자들을 상대로 기술-디자인-마케팅 전쟁을 한바탕 마친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엄청나게 선전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 한국 경제는 투명하다. 미국이 미국일 수 있게 만드는 이유중 하나는 여러 문화 사이의 대화를 주선할 수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이민으로 건설된 사회인 탓에,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모여들어 공존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다른 문화 사이에도 대화가 가능하도록 법-제도-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에 따른 다양한 법-제도-준법정신이 미국을 투명하게 만든다. 미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성문화 된 법-제도만 찾아보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는 덕이다.
외환 위기 후 IMF 개혁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시장을 규율하는 법과 제도는 거의 미국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개방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한국은 개혁을 요구하는 해외 자본에 대해 여전히 ‘버티기’ 전략을 쓰고 있는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 또한 아직 대부분의 결정이 관료의 자의적 통제 아래 있는 중국의 제도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객관적이고 시장 친화적이다.
셋째, 한국은 전통과 현대 사이의 절묘한 중간 지대에 서 있다. 한국은 오랜 역사로 아시아의 전통-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에서는 서양식 시스템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다. 그러나 여전히 매우 아시아적인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얼마전 전주시는 조선 시대 마지막 왕족인 이석 왕자를 전통 가옥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미국 최대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2004년 12월 30일, 이 소식을 1면 주요 기사로 실으면서 이렇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침략으로 상처받고, 내전으로 갈라지고,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불안정을 겪은 후, 한국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문화적 뿌리를 찾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 이점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폐쇄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국 같은 급격한 구조 개혁도 쉽지 않은 문화 형태다. 게다가 이미 덩치가 너무 커졌다. 스스로 하나의 거대 경제권을 이루고 있어, 빠르고 유연해야 하는 허브 역할을 하기 어렵다.
싱가포르는 시스템에서 한국보다 투명할지 모르지만, 인구가 적은 도시국가인 데다 보수적인 정치 권력 탓에 역동적 소비 시장을 갖기 어렵다. 대만은 중국의 통일 압력에 따른 정치적 불안을 한동안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여전히 국가 중심의 권위주의 사회가 유연성을 갖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벌써 한국 시장이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으리라 보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IT 기업들은 한국 시장을 아시아의 테스트마켓으로 여기고 제품을 먼저 내놓기도 한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 장사를 해보고, 진행이 잘된다면 한참 뒤 중국-인도 시장이 열리기 직전에 그쪽에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GM이나, 한미은행을 인수한 씨티뱅크도 모두 이런 전략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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