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한미 FTA
자유주의에는 다양한 조류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자유주의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롤스와 드워킨으로 대표되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인데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일단 롤스적 자유주의로 더 좁히도록 하겠다.
1. 만일 한미 FTA만이 살길이라면 롤스의 기준을 통과한다. 나라가 망하는 경우에는 정의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 문제는 그 전제가 경험적인 근거에 의한 것인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롤스에 따르면 자유주의 정치에서는 상식과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근거에 의한 주장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가 지금과 같이 비장한 각오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생각은 아직 그들만의 직관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 한미 FTA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추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의론적 검토의 대상이 된다. 그런 전제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2원칙인 차등의 원칙을 경제적 문제에 적용한다면, ‘한미 FTA를 하지 않는 경우보다 경제적으로 가장 형편이 나쁜 사람들의 형편이 더 좋아진다’ 또는 최소한 ‘가장 형편이 나쁜 사람들의 처지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더 형편이 좋아진다’는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비록 한미 FTA를 하면 양극화가 심화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최저생계의 수준이나 실업대책이 지금보다 더 높아진다면 이 기준을 통과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정부가 내놓은 ‘비전 2030’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비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우세하다.
3. 정의에 대한 1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정치적 문제에 적용시킨다면, 한미 FTA는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상시키거나 최소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미 FTA는 국민들의 경제적 자유는 확장하고 정치적 자유는 축소시킬 것이다. 특히 현재처럼 대외의존률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그 의존률을 대폭 증가시키게 될 한미 FTA를 하면서 예를 들어 투자자가 정부를 고소한 사안을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아닌 국외의 다른 기구에서 결정하도록 한다면 우리나라의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상당한 정도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질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는 것 자체는 정치적 자유의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롤스적 자유주의는 사회적 재산이나 자연적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정치적 자유나 양심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권리로 간주하지 않는다. 투자자 정부 소송을 인정하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가 갖고 있는 국내 재산을 비롯한 그들의 경제적 권리를 신체적 자유같이 신성불가침한 기본적 권리로 보장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롤스의 정의론에서는 정치적 권리가 경제적 권리보다 더 기본적 권리이며 정치적 자유에서의 손실을 경제적 이익으로 보충하는 것을 금지한다.
4. 롤스나 드워킨의 liberalism에서 분배적 정의에 관한 논의는 재분배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재분배라는 개념 자체는 소유권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libertarianism은 그런 논의 자체를 넌센스로 본다. 시장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liberalism이나 libertarianism은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인정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그것은 마치 말을 타고 질주하면서도 고삐를 잡고 질주하는 것과 고삐가 없이 질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아예 말을 타려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libertarianism의 입장에서는 한미 FTA를 통해서 경제적 자유가 확장되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소유권을 움직일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 보는 입장에서는 그 권리를 (우리나라의 불순한 대중들에 의해서) 움직일 수 없는 권리로 만드는 것에는 한미 FTA와 같은 방식의 FTA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국제재판이 당사자들이 평등한 상태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재판의 결정이 국력과 관계없이 강제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일 FTA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세계화가 필연적이라면 롤스의 liberalism의 관점에서 는 더욱더 폭넓은 세계화를 옹호할 것이다. 그것은 시장의 왜곡을 시정할 수 있고 국가들 사이의 분배에서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의 존재를 요구하는 것에 까지 이를 것인데, 그것은 세계정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롤스는 세계정부의 이념을 비현실적 이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5.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과같은 방식으로 추구되는 한미 FTA는 liberalism의 입장에서는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렵다고 본다. 나는 libertarianism도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중의 하나이고 또 우리의 여건상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으로써 이미 충분히 우파적 정책이기 때문에 그 정책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진보적일(liberal)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롤스의 구분에 의하면 정의로운 자유주의 국가가 될 수는 없고 기껏해야 복지국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좌파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그런 형태의 체제가 될 것인데, 롤스는 복지국가의 정치제제를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제안 한 이면에는 궁극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지향하는 체제와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가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점에 대한 통찰이 있다고 본다.
6. 만일 우리가 앞으로 이념을 중심으로 정치지형이 개편되기를 희망한다면 그에 대한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로 영국식과 미국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규정하고 있듯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이 liberalism이라면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그들의 현재의 마인드는 그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책을 공감을 끌어내는 절차를 생략하고 지금처럼 과격한 방식으로 추진할 경우 우리당은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의 세력의 분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지금 한미 FTA를 가장 반대하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지만 노무현정부의 FTA 추진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게 될 당은 민노당일것이다.
주대환 전 민노당 정책위원장은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영국처럼 민주당 대 보수당에서 노동당 대 보수당의 지형으로 바뀌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가 최악의 시나리오로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민주당 대 보수당과 같은 방식으로 양당제가 고착되는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이 liberal한 인사들이 ‘경제적으로 더 유복한 사회’를 위해서 평등과 정의라는 진보적 이념을 포기하는 양상이 지속되고, 민노당이 이념적으로 보다 유연해진다면, 그리고 대북정책에서 정당들간의 차이가 줄어든다면 주대환 전 위원장의 희망대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현 시점을 자유주의의 위기로 진단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참조: 다음은 주대환 전 민노당 정책위원장이 '초록정치연대'에서 말한 부분이다.
" 민노당은 영국노동당이 했던 것처럼 자유당, 보수당의 양당체제를 보수당, 노동당의 양당체제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한국의 보수양당체제가 한 때 약간 흔들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업그레이드된 보수양당체제로 다시 정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이 변하는 속도를 보라. 지금 한나라당에게 20년 전 하던 비판이 통하는가? 이대로 10년 쯤 가면 미국의 민주당, 공화당 버금가는 보수양당체제로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4류정치가 3류, 2류로 진화하는데 걸릴 시간이 많지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노동당이 2등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소선거구제가 나을 수 있다. 영국자유당도 오래동안 집권당이었으나 노동당과 역전되는 순간 몰락해 버렸다. 2등이 중요한 거다. 1등을 꼭 하려고 하지 말고 2등을 하도록 노력해라. 가장 바람직 하기는 노동당과 보수정당 체제로 되고 거기에 녹색당이 훌륭한 3당 체제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