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님이 의료소비자로서 한의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글입니다.
의사가 아니라 의료소비자로서 한의와 양의를 따진다면 나는 한의학을 지지한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의사들의 친절도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내겐 한의학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몸의 이상으로 양의원(한의원의 상대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서양의학이 의술의 표준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을 찾곤 하지만 '검사해보니 이상없다' 좀 자세하다 싶으면 '과민성...'의 설명만 듣곤 했다. 나는 분명 몸의 이상을 느끼고 간 것인데 결론은 건강염려증 환자가 되다보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양의학은 명확히 관찰되는 내외상이나 세균적으로 검증가능한 고장이 아닌 몸의 이상에는-한의학적으로는 장부의 허실 또는 기의 운행상 문제 같은 것-에는 무기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들끼리 하는 말로 과민성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 같기는 한데 원인이 뭔지 잘 모를 때 두루뭉실하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김승열님의 글중에 소비자로서 이상하게 들린 것이 한의학은 치료효과를 어떻게 검증하느냐는 것이었다. 무식하게 답변하면 치료되었는지 안되었는지는 환자가 아는 것 아닌가. 내가 기력을 회복하면 나은 것이고 아니면 치료가 안된 것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과학적이라는 것에서 서양의학에 대한 불편함이 나온다. 나는 배제되고 내 몸의 일부만이 객관적 실험의 대상이 되고, 또 통계화된 결과 속에 나의 구체성은 사라진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나는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의 소유자일 뿐이라고 할까.
그 고통을 너무 잘 알아 정작 의사들도 외면한다는 항암치료를 생각해보자. 몸 전체야 페허가 되든 말든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핵폭탄을 투여한다. 내가 아는 분은 고통스러운데 치료효과도 불분명한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대체요법을 시행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얼굴색도 좋아보이고 무엇보다도 본인이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양의학적 관점에서는 암이 점점 더 진행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죽더라도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는 것이었다.
매직 존슨은 어떤가. 그는 분명 에이즈 환자였지만 정기건강 검진결과는 정상이지만 만성피로에 골골한 정상인들보다는 건강한 생활을 했었다. 과학적인 치료와 정상이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건강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기에 그 과학적 의학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기기 힘들었다.
소비자가 본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치료방식의 차이
서양의학은 병의 증상이 있으면 그 원인을 밝히고 그 원인(세균)에 어떠한 작용을 가했더니 원인이 소멸되었다라는 것으로 병의 치료효과를 검증할 것이다. 내가 아는 바로는 한의학은 병의 원인보다는 몸의 상황을 중요시하고 몸이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약이나 침이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몸이 자기 조절력을 회복하도록 도와줄 뿐이다라고 말한다. 쉬운 예로 비교하자면 적이 침입할 시 서양의학은 침투한 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퇴치할 가장 적절한 외인부대를 투입해 이 적을 박멸시키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은 적의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영토의 어느 부분을, 어디까지 쳐들어왔느냐가 중요하고 그 상황에 따라서 위급지역의 아군을 보강해 전선의 통제력을 확보하는데 중점을 둔다. 적군이 남았더라도 통제가 되고 일상이 가능하면 치료가 된 것이다. 어차피 우리 몸이라는 것은 세균덩어리고 암세포도 내세포가 아닌가.
위가 병이 났으면 위염, 위하수, 위산과다, 위무력증에 따라 서양의학은 원인이 다르기에 무기가 달라지겠지만 한의학은 위가 허하냐 실하냐에 따라 허하면 보해주고 실하면 사기(나쁜 기운)를 빼줄 뿐이다. 그래서 다른 병에도 같은 치료가 사용되고 같은 병에도 상황에 따라 다른 치료가 사용된다. 그 정확한 원인보다는 현재 상황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지나친 단순화이겠지만 원인이야 어떻든 현재 장부의 허실을 가려내고 이를 조절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비해 서양의학은 전체적인 관련은 무시한 채 그 병증 하나만 분석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 그래서 국토전체의 자정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냉혹한 과학적 작전도 펼친다.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관찰과 검증가능한 부분으로 축소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실험의 정확한 재현은 고정된 실험실 환경에서나 가능하다. 그에 비해 한의학은 상황의 변화를 중요시한다. 그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화의 원인으로 기후등의 외인뿐만 아니라 내인 등도 중요시하기에 변화의 원인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재현하기도 어렵다.
현실에서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오늘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기본적인 관점과 내적인 체계와 구성원리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다름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해서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현대의 서양의학은 근대과학의 출현으로 가능했다. 과학적 도구가 없다면 양의사는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서양의학은 과학에 맞게 발전해왔다. 하지만 한의학은 근대과학이 출현하기 휠씬 오래전부터 과학적 방법의 도움 없이 병자들을 다루어왔다. 한의학은 때로는 직관과 통찰을 사용해가며 나름의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이런 의술의 역사성을 도외시한 채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들이대며 당신네는 왜 그렇지 못하냐고 물을 수는 없다.
지금의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길인가
과학적 잣대를 들이밀기 위해서는 그 과학적 잣대가 얼마나 만능인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게놈프로젝트는 인간과 초파리의 유전자수가 비슷하다는 놀라운(?) 발견과 함께 더 많은 과제를 남겨 놓았다. 서양의 근대에 탄생한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 서양의학은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또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김승열님의 말처럼 서양의 과학이 끊임없는 부정과 회의라는 방법을 통해 발전해 온 것이라면 지금의 것도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서양 약물의 역사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페니실린처럼 탁월한 효능의 약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여러 부작용이 발견되고 결국 금지 약물이 되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진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알고 있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실은 매우 제한된 진리만 담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 도구였음이 후세에 밝혀지지는 않을까. 마치 시공간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진리가 뉴튼 과학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물리학이 도달한 연구결과가 불교의 사유관과 같다는 것처럼 동양의 의학관을 더욱 진보된 과학적 의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서양의학은 근대의 역사에서 혁혁한 전과를 기록하였다. 또 서양의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의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의학이 도태되기는커녕 왜 다시 부각되고 있을까.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체의학을 찾는 발길은 왜 늘어만 갈까. 의료소비자들이 날이 갈수록 과학적으로 계몽이 덜 되어서 일까.
서양의학의 한계지점에서 대체의학의 수요가 발생한다. 지금 서양의학에겐 필요한 건 서양의학적 방식의 강요가 아니라 그 방법에 대한 돌아봄이 아닐까!
(2002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