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의 거짓>
온갖 열악한 상황의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윗세대를 ‘가진 세대’로 묘사하고 조금의 3D(dangerous difficult dirty업종)도 싫어하며 80%가 대학을 나와 관리직만을 되길 원하는 현세대를 ‘착취당하는 세대’ 혹은 ‘없는 세대’라고 보는 것 자체가 세대론의 거짓말이다.
과거와 비교 하자면 현재의 대학 진학률은 지나칠 정도로 너무 높다. 과거 80년대만 하더라도 진학률이 일반4년제 대학인 경우 5~10%였으며 전문대학까지 다 합해봐야 대략 15%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이른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하여 세대론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소위 잘나가는 대기업이나 공사 공무원 등 깨끗한 관리직 일자리는 없어서 못 들어가고 또 못 들어가서 온갖 아우성소리를 질러대도 중소기업의 현장은 사람이 부족해 일자리는 남아돈다. 이것은 승자독식이 아니라 다자독식,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을 나온 계층독식 혹은 대학독식이 불러오는 계층내 노킹현상이다.
중소기업들이 설비투자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에게만 기대고 있는 현재의 궁극적 원인도 젊은이들의 모든 관심과 역량이 대학에만 집중되어 있고 그들을 도와줘야 할 사회적 역량 또한 대학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열악한 중소기업 환경에 대해서는 이 사회가 돌아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젊은이들의 요구사항이 대학에 대한 것만으로 도배되어있으니, 당연히 열악한 중소기업 현장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고 사회적 개선의지와 개선요구의 목소리 또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장근로>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중소기업 관리직 보다는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있는 현장일이 좋을 것 같아 일전에 한번 소기업 작업현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화학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었다. 어느 여름날 공장 환기를 위해 열어 논 조그만 창문 때문에 이웃 공장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그 창문을 열어 놓으면 정신이 어지러워서 자기공장사람들이 작업을 할 수가 없다며 빨리 창문을 닫으라고 다구치고 있었다. 그렇게 이웃공장 사람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한참을 떠들어 댔었다. 그 강력한 항의에 우리는 그 찌는 더운 날 모든 창문을 닫고 작업해야 했다. 작업 후 몸에 묻은 약품은 신나로 목욕하듯이 닦아냈다. 그리고는 모두들 담배 한 개피 씩 피우는데 담배 안 피는 나도 따라 우두커니 같이 서있었다. 한 번은 같이 일하시는 분이 ‘뭣 땜에 여기 왔어’하고 묻길래 단순한 일을 찾다보니 오게 됐다고 하니 젊은 사람들은 올 때가 못 된다며 빨리 나가라고 했다. 물론 그 공장의 작업환경은 극단적인 경우였지만 나에겐 중소기업의 작업현장이 얼마나 낙후되어있고 힘든가 하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 경험이었다. 주방용품 공장에서 관리직 일을 할 때도 현장에 내려가면 연마하시는 분들은 방진마스크를 썼음에도 코와 입 언저리가 언제나 까맸었다.
<노동쟁의가 필요 없는 중소기업의 현실>
만약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 근로자가 아닌 우리나라의 젊은 노동자에 의해 중소기업이 채워졌다면 과연 이런 중소기업의 열악한 근로조건은 계속됐을까 나는 물어본다. 아마도 꾸준한 개선의 목소리가 이어졌을 것이다.
중소기업현장의 목마름을 좌파와 시민단체는 잘 모르거나 아니면 ‘중소기업은 원래 그런 거야’하며, 언제나 그러려니 하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것 같다. 그런 무관심은 어느 누구도 중소기업에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났다. 남아있고 싶고 매력 있는 직장일수록 그 곳에 남기 위해 사람들에겐 노동쟁의가 필요한 것이다. 나이 든 갈 곳 없는 사람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불평불만 없는 사람들에 의해 중소기업이 돌아가는 것은 중소기업이 남아있고 싶지 않은 매력 없는 직장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임금 개선이 아니라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
노동운동조차도 대기업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에 대한 정부의 설비자금 지원과 제도적 지원에 대한 요구보다는 오로지 임금 위주의 사측과의 투쟁만으로 끝난다. 중소기업이야말로 저임금에 대한 투쟁이 필요한 곳이지만 그것보다도 중소기업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열악한 작업환경의 개선이며 이런 것을 노동계가 앞장서서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중소기업은 노동쟁의를 할 여력이 없는 곳이기에 산업별노조에서 그 역할을 대신해 주어야 함에도 현실은 대기업 사업장에 대한 일종의 기득권 투쟁에만 골몰해 있다.
<잘못된 투쟁 노선 ; 작업환경 개선의 주체는 정부>
산업별 노조 혹은 전체 노동계가 중소기업 노동자문제에 대해 방향을 못 찾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사측과의 이익조정에 대한 투쟁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요구조건을 감당할 수 있는 대상은 주머니 사정도 가뜩이나 안 좋은 중소기업사장이 아니라 정부이기 때문이다. 다시 부연하자면 기존의 투쟁노선이 사측에 대한 요구와 임금협상의 문제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중소기업에 대한 노동운동은 정부에 대한 것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노동계가 제대로 된 방향설정을 못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중소기업 근로자들을 대변해야할 노동계가 오히려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노동운동을 결과적으로 포기한 결과가 되었다.
정부가 창업지원 하는 것도 좋지만 있는 기업도 제대로 못 살리면서 창업지원을 한다면 그것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이다. 제조업 위주의 건실한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면 지금 부터라도 정부는 중소기업 노사문제에 있어선 제3자가 아닌 당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맡을 역할은 중소기업의 설비나 작업환경의 개선 지원이어야 할 것이다.
<대학독식 사회 ; 계층독식 사회, 남에 꺼 뺏기>
가져갈 사람이 자기 몫을 가져가지 않으니 정부금고 안의 탐스런 과실을 이제 대학생들이 차지하려 한다.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가져가야할 그리고 미래의 고졸 사원들이 가져가야할 몫을 이제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해 투쟁하여 가져가려 하고 있다. 그들 대학생들에게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등록금 지원보다는 열악한 산업현장 근로자들에 대한 지원이 비용상 훨씬 적고 국가의 산업구조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길에 대해선 묻지도 않고 생각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대학독식사회라 안할 수 없다. 그리고 말이 우습지만 특정계층 모두가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계층독식이며, 승자독식이 아니라 다자독식이다. 계층을 소득수준이나 재산정도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하나의 함정이다. 소득수준이나 재산정도로 계층을 가른다면 조선시대 양반의 하나인 잔반들은 대부분이 노비나 하인 계층으로 분류됐어야 했을 것이다. 계층은 재산에 따라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으로 쉽고 단순하게 분리할 것이 아니다.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삶의 방식에 따라 같은 재산이나 소득수준 집단도 다른 이익집단이나 다른 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의 계층구조를 재산이나 소득수준에 따라 단순하게 삼등분하여 사회문제나 사회갈등을 조절하고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는 큰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계층독식의 심리는 이런 단순한 심미안에 기생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확장하고 안정시키려 한다.
<세대 게임이 될 수 없는 기득권 지키기>
이것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고래로부터 대학출신들이 기득권세력이 아닌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언제부터 대학출신들이 기득권에서 제외됐단 말인가? 결국 기존의 기득권층인 귀족노조도 대학생도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아도는 공산품으로 팔 곳 없는 국제화 시대의 격랑에서, 전자는 정리해고로부터, 후자는 취업전선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전략을 짜는 것이다.
일전의 보편적 복지논쟁도 그렇고 무상급식문제도 그렇고 중산층의 기득권 지키기는 피눈물이 날 정도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추락이 당연하다고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올라가는 종목이 있으면 내려가는 종목이 있듯이 올라가는 집단이 있으면 내려가는 집단이 있다. 계층고착이 일어날 때가 성장과 분배 양쪽에 가장 나쁘다. 계층고착은 기득권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때 일어난다.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는 지금의 현실에서 대학생등록금 지원은 단지 대학 출신자들을 그 양 극단 중 하나인 부익부 집단에 억지로 남겨두는 배려일 뿐이다. 국가구조개선을 위해 쓰일 돈을 그렇게 대학등록금에 갖다 바치는 것은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돈을 기층 산업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것이 전체 산업구조를 위해서도 좋다고 나는 생각할 따름이다. 소위 3D산업에 대한 환경개선만으로도 대학에 관심 없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또는 취업을 이유로 대학에 간 젊은이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돌려놓을 수 있다. 80% 대졸출신이 넘쳐나는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고비용의 서비스산업 위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만 한다.
<고등하교 졸업생의 80%가 대학가는 현재의 추세는 제조업 중심이 아닌 서비스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만들 뿐이다.>
대학과 취업을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학문의 전당이 취업학원이 되 어가는 현실이 과연 옳은 것인가?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은 낭비일 뿐이다. 대학을 들어가는데 사회적 장벽이 있어선 안 되지만 대학이 의무교육기관처럼 운영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그 학문이 필요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많은 대학생을 먹여 살리려면 혹은 대학교육이 취업교육으로서 헛되지 않으려면 서비스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것은 좌파가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오세훈전시장이 내세운 ‘디자인 서울’과 같은 사업이 오히려 대학생을 양산하는 현재의 현실에 맞는 정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오세훈전시장이나 박원순현시장이나 모두 대학출신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는 사람이라 안 할 수 없다. 전자는 서울을 서비스 산업위주로 정책을 이끌어감으로써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창출하려하고 후자는 현재의 대학 등록금을 공짜로 함으로써 다른 계층에게 갈 돈을 대학생들에게 쏟아 부으려 한다.
내가 이처럼 말하는 근거는 대학교육의 대부분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조업과 거리가 먼 서비스업과 가까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 하는 목표 중 하나는 지식인으로서 교양이며 이것을 직업과 연계시키면 바로 서비스업과 밀접히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지중심의 예산은 대졸출신 실업자들을 산업현장에 재배치하는 것을 방해하여 서비스업에 남겨둘 여지가 많다.
<집단최면으로부터 해방해야>
대학출신 중심의 복지예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산업현장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일예로 어려운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원으로 대학에 가려는 젊은이들이 교육현장에는 넘쳐난다. 그들이 유능한 인재이거나 공부 자체를 하고 싶어 한다면 예외지만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한다면 이는 결국 세금을 축내는 일이요, 집안의 어려운 환경을 개선하기위해 산업현장에 뛰어드는 책임감 있는 젊은이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행위이다. 진정한 복지가 되기 위해선 이처럼 자신의 일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돕는 복지가 돼야 할 것이다.
언젠가 이해찬 전교육부장관이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가는 사회를 부르짖은 다음부터 이 세상은 대학을 나와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집단체면에 걸린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잘하는 일 한 가지로도 행복한 일상을 꿈꿀 수 없단 말인가? 우리는 이전부터 그런 사회를 추구해왔어야 했고 지금부터라도 그런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또 우리 사회구성원들도 그렇게 살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누구나 대학가는 세상이 된 다음부터 생산현장은 텅 비고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와 나이든 사람들로 채워졌다.
<앞으로의 나아가야 할 길>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손에 기름을 묻히며 기계를 만질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말이다. 그러나 취업을 위해 대학에 갔다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됐다면 그것은 사회적 손실이다. 또 그렇게 되서도 안 된다. 대학에서 보낸 그의 노력과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국가는 제조업 위주에서 서비스업 위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거나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조업 중심의 우리나라 경제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같은 제조업을 해외에 매각한 영국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조업 없는 산업구조는 내실을 기하기가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현재의 대학 등록금이 비싸며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 안할 수 없다. 대학의 부풀려진 등록금은 분명 고쳐져야 한다. 그러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다고 현재의 부풀려진 등록금은 너도 나도 대학에 가겠다는 대학만능이 만들어낸 현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필요이상으로 대학에 올인 하는 현상은 대학이외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동등한 출발선상에 설 수 있을 때 고쳐질 수 있으며, 대학등록금 문제는 그 후에 논의 할 문제이다. 현재의 무조건적인 일방통행과 수적 다수로 밀어붙이는 열광은 국가의 앞날을 위해서도 그리고 한 개인의 미래를 위해서도 해로울 뿐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스스로에게 대학교육의 길을 물어보고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가는 사회가 아닌 한 가지만 잘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뜻과 생각을 모아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