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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자격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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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THESE
Date : 10-07-30 12:37
Hit :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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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URL : http://www.skepticalleft.com/bbs/tb.php/01_main_square/8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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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49쪽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일전에 내가 Palamedes님에게 질문한 요지는 [북한은 그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였다.
| 제 의견은,, 진리에 관심이 없는 도둑이나 깡패와 episteme를 논한다면 우리는 결코 1센티도 episteme에 접근하지 못한다라는 주장입니다. ..(중략).. 자기 자신의 유익 불익에 따라 확실한 존재조차도 부인하기를 밥벅듯이 일삼는 도둑 깡패를 상대로 글 혹은 목숨을 거래할 때도 과연 doxa냐 episteme냐를 따질 이유가 있을까..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롤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격'이란 행운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선 것은 우연이다. 그 우연이 참이라면, 국제사회에서 체제때문에 경제제재 등 국제적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분명히 부당한 대우에 속할 것이라는 주장도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46명이 죽고 침몰되어 남한 군사력에 도발을 가한 천안함사건을 부인하는 북한을 인정, 두둔하고 북한에게 소위 [(미국)노예해방 이전의 인종차별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흑인에게 특혜주기] 등등은 것은 어쩌면 롤스의 정의에 일치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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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살인 사건과 같이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판사나 법률가들이 episteme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들이 episteme에 근거해서 판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언제나 판결은 doxa에 근거한 판결입니다. 그런데 doxa라고 하더라도, 근거가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근거가 약한 doxa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증거가 강해야 하는지는 사법적 역사가 오래된 사회일수록 그에 대해 일정정도 합의되어 있는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의자가 유영철과 같은 흉악범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순진한 사람이거나간에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런데 롤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격이란 행운에 불과하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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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제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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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롤스의 입장은, 행운에 해당하는 것들, 예를 들어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나, 좋은 머리나 아름다운 신체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그러한 혜택을 받은 것은 그러한 혜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deserve)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자격이란 행운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그런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샌델이 인용한 원문은 이렇습니다. "no one deserves his greater natural capacity nor merits a more favorable starting place i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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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ervation을 국가 적용한 진술이 본문입니다. 북한 체제는 우연(or 불행)이지, 북한인민들의 자발도, 선택도 아닙니다. 북한 편향적 태도의 완벽주의 증거주의 확증주의 일간지 기자와 사회주의 시민단체의 태도가 혹시 롤스의 평등에서 북을 동정한 것 아닐까 보았습니다.
본문 中의 인용 댓글에서 북한관련 Aletheia와 Doxa를 논할 '자격'을 물은 것에 대한 palamedes님의 표현방식도 인정합니다. 살인범도 자기변호가 인정되듯 북한만의 Doxa가 있겠지요. '내가 쐈다는 물증있냐'말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하나하나 반박을 하는데 남한의 여러 명이 나서서 가담했지요.
비약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더 나아가 美帝음모론까지 상상하는 주장 - possibility의 [당연함]의 입장이 과연 어디에서 유래할까? 의 여러가지 이유와 설명 중 하나로 상대적으로 동정받을만한 [북한자격]이 대비되었습니다. 북한 핵실험 성공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면 [힘있는 테러리스트의 카리스마에 심정이 끌려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syndrome]으로 해설되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 인용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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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deservation은 잘 안쓰는 단어인데, 어느 맥락에서 나오나요? deserve에 대응하는 명사로는 주로 desert가 쓰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샌델이 도덕적 자격이라고 말한 것은 moral desert의 번역입니다.
"정의가 무엇인가"는 사놓고 읽지는 않았는데, 지금 보니까 오역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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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고맙습니다. 댓글은 그냥 두어야 다른 분들이 보시겠죠.
그런데, 이것을 시험이라 가정하고, desert(s)를 deservation이라한 오류에 대한 점수를 정한다면, 몇 점정도 감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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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tue’을 사용하시거나, 정 a word relevance to 'deserved'를 사용하고 싶으시면, ‘deservedness’를 사용하거나 쓰는 게 사용하신 문맥상 더 적합하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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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용법인데 굳이 오류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deservation은 사전에는 안나오지만, 구글링하니까 가끔 사용되네요. 주로 인도 영어에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deservation은 reservation과 대립되어 쓰이는 말로 보입니다.
본래 reservation과 대립되는 말은, dereservation인데, 그 말은 예약되어 있던 것 혹은 특수한 목적으로 남겨두었던 제한조치를 해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dereservation에서 가운데 re를 빼면, deservation이 되는데, reservation과 대립되어 쓰이는 경우를 보면, 어떤 자리를 특수한 계급을 위해서 남겨두는 것(reservation)이 아니라, 그 자리에 적절한 자격이 있는 사람(deserving)을 배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생각에, deservation은 dereservation에서 만들어낸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reservation이냐 deservation이냐의 문제는 신분에 따라 특권이 인정되는 인도에서 심각한 것으로 보이네요.
Last week, the B. S. Yeddyurappa-led government discreetly dereserved approximately 5,000 sq km of forest land in 13 districts without making any official announcement. ......The cabinet note regarding this decision states that the 302 sq km of dereserved core forests is a "bushy area" and "will be thrown open for mining of important mineral resources.
Sure enough. I am not suggesting that we need to be biased against someone because of the caste factor. Deservation is good if it means only deserving (on merit and not on caste factor) can get in (be it a job or a college seat). Its reservation that I am against because Reservation ruins Deservation.
against deservation of tekdis for construction as opposed to earlier plan of reserving them for biodiversity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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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모두 고맙습니다. 각설하고,
Palamedes/
강원대 민경국교수의 하이에크(2007) 중 롤스 비판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http://blog.daum.net/chakhan_prion/57
"롤스의 엘리트주의적 자만, 지적 자만은 그가 기술하고있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에서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다(495쪽)"
링크는 일전에 여기 논객이신 "Hayek님"이 의견을 부탁한 [자생적 질서]를 복습하다가 롤스가 저에게는 선뜻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참고하고자 제 블로그에 스캔해 둔 일부입니다. 해당 내용 중엔 일부 샌들도 등장하는군요. doxa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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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인용하신 부분은 롤스의 원초적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저는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봅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도 형이상학적인 명제입니다. 그렇지만 정치철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현대 정치철학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사회발전에서 이성적 기획 혹은 사회공학적 이념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의 역할을 부정합니다. 그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사상은 시장만능주의라 할 수 있는데, 개인이나 집단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개입하는 것, 즉 시장을 제한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자만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사상의 출발점은 에드문트 버크입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가들이 사회의 부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전통 모두를 부정하는 것에 경악합니다. 역사의 지혜에 비교하면 정말로 보잘것 없는 지식밖에 갖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지나치게 맹신한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하이에크의 사상은 그러한 버크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그러한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하이에크는 뉴딜을 통해서 등장한 미국의 자유주의도 사회주의사상과 비슷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롤스의 정의론, 즉 정의라는 기준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성을 통해서 세우는 것도 그러한 자만과 비슷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는 시장을 원칙적으로 중시한다는 점에서 구좌파와 다릅니다. 자유주의는 하이에크주의와는 달리 시장에만 적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시장 자체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시장은 완전한데 실제의 시장은 여러가지 이유로 왜곡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시장에 맡기되, 벗어나서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부분이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현대 자유주의 철학이 구사회주의와 다른 점은 자신들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인 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reasonable한 것으로는 볼 수 있지 않느냐, 혹은 plausible한 것이 아니냐 정도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하이에크의 이론이 오늘날의 시장주의자들에게 지배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하이에크 이론에 충실하려면 미국처럼 연방은행을 통해서 이자율을 조정하고, 위기에 빠진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서 구제금융 정책을 쓰면 안 됩니다.
"망하게 두지 왜 구제해주냐?"라는 질문에, "그들이 이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망하면 못사는 사람들이 가장 고생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전형적인 롤스주의적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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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냥 그대로 현실의 시장에 맡기는 것은 아니지요. 하이에크 본인도 시장이 완전하다거나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효율을 가져온다고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 개개인이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질서(이른바 자생적 질서이지요, 저는 이게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는 인간 개인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초월해서 개개인의 행동의 상호작용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인간이 이성으로만 그 질서를 파악해서 그 질서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왜곡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시장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하이에크나 하이에키언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완전하다고 생각지도 않고 실제의 시장은 왜곡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동일하지요, 무슨 여기에 자유주의자나 하이에키언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이에크의 주장은 질서 자체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는 시장질서에 의도적으로 시장질서를 특정한 목적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개입적 시도는 인간이성의 한계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사회주의와 달리 시장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는데 근본적으로 "사회적 정의"라는 레토릭을 달아놓고 이런 저런 이유로 시장질서에 개입을 하는 것은 유사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사회적이라는 수사의 모호함으로 인해서 근본적으로 시장질서에 개입할 수 있는 한계가 애매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성의 한계로 인한 자생적 질서에 대한 개입을 통한 목적적 변화의 실패를 주장하는 하이에크나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하이에크나 그의 공감자들도 시장의 불완전한 부분이나 실제로 왜곡될 수 있는 부분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은 자생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근본조건들을 찾아서 그 근본조건들의 유지,복원을 통해서 그 질서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롤지언같은 사람들은 시장질서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죠. 대표적으로 롤즈는 무지의 베일 운운하면서 어떤 합의를 통해서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에크나 다른 사람들의 차이가 과연 시장의 완전성에 대한 견해나 실제 상황에서의 시장왜곡의 가능성에서 빚어지는 것일까요? 저는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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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옛날글 보다보니 pal님이 드워킨 책 여러권 번역하신 분이더군요. 정말 꼼꼼하고 훌륭하게 번역 잘 해주신듯 한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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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1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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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하예크가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이고, 롤스는 도리어 수정 자유주의자에 속합니다. 미국식 liberal의 용법이 그렇다고 반론하실지 모르겠지만, 미국 정치철학계에서 롤스를 얘기할 때 liberal 이란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애매한 용어 사용으로 여겨져 삼가고 있습니다. 롤스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킴리카의 현대 정치철학(번역본이 있음)도 결코 그냥 liberal 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egalitarian(평등주의적)이란 용어를 덧붙입니다. 롤스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서 있으며, 이는 한국어 번역본 '정의론'에도 지적되어 있습니다. 번역자는 이를 장점으로 여기지만, 저는 이것이 롤스 이론의 각종 모순의 원천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개념의 추상성으로 말하자면 롤스의 원초적 입장 개념과 그의 방법론이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보다 훨씬 더 추상적입니다.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가 형이상학적이라면 순전히 자의적인 사고실험에만 의존하는 롤스의 철학은 형이상학 그 자체밖에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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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hayek, 산마로/
날씨 좋은 주말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월요일에 접속할 듯 합니다. 좋은 설명 고맙습니다. 천천히 꼼꼼하게 의견 주시니 단어하나 문장하나에 온 신경이 집중됩니다. 글로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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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1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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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ek// 롤스를 조금 오해하고 계십니다. 무지의 베일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사회 체제들을 평가하는 규범적인 척도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고 무지의 베일이 시장 개입이 필요하다는 필연적 근거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초기에 하예크는 롤스에게 동의했고, 만년까지도 자기 사상과 롤스의 사상이 크게 대립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하예크의 모든 저작을 읽어본 것이 아니기에 구체적인 구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예크는 롤스의 최소극대화 기준이 장기적으로 자유 시장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실제로 롤스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소수의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요.
즉, 최소극대화 기준은 도달하기 위한 목표이고, 자생적 질서는 어떤 목표-이상적 사회(하예크의 1976년도 저작'사회정의라는 신기루'에서 그 단초가 설명되어 있습니다)에 이르기 위해서 왜 자유시장까지 포함한 개인들의 자유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와 롤스의 '질서 잡힌 사회'를 대립시키는 것은 서로 범주가 다른 개념을 비교하는 오류가 됩니다.
이런 오류를 범한 대표적인 하예크 해설자가 바로 민경국인데, 그의 하예크 해설서는 꽤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예크와 다른 정치철학자들을 오독하고 있어요. 경제학적인 접근 때문에 하예크의 대표적 정치철학서인 '사회정의라는 신기루'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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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기억으로도 법,입법 그리고 자유 제 2권인가 3권 "사회적 정의의 환상" 부분에 하이에크가 롤즈에 동의한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고 기억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의도적 질서의 형성이 아닌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미치는 추상적 질서라고 하면서 롤즈에 동의한다고 언급한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무지의 베일이 시장 개입이 필요하다는 필연적 근거가 된다고 써놓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오해를 하도록 적었군요. 다만 그를 비롯한 평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차이점이 시장개입을 직접적으로 열어두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롤즈의 방법론은 사회 체제들을 평가하는 규범적 척도를 얻어내는 것이죠, 다만 그 방법론은 열려 있기 때문에 자생적 질서 개념과 같이 질서 자체의 유지 조건을 돌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직접적 시장개입을 옹호하는 식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언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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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ek//
불현듯 these님이 드리운 하이에크 낚시밥을 덥석 잘못물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뭏든 감사합니다. 지난 번에 나온 책은 서둘러서 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지만, 요번에 나온 책은 공좀 들였습니다.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hayek, 산마로//
일단, 롤스의 이론은 규범적(normative) 이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의 기초는 도덕적 판단에 대한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신념들, 예를 들면 "노예제는 나쁘다" 등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성되고 또 그런 것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원칙들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그러니 그의 학문에는 사회적 사실이든 자연적 사실이든 그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론은 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과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들은 그의 이론에 이용됩니다.
그에 비해서 저는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은 사회적 사실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봅니다. 사실에 대한 명제는 과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명제로 구분할 수 있겠지요. '과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자생적 질서'의 개념은 형이상학에 가깝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특히 그것이 '최선의' 질서라는 가치판단이 결합될 경우 그렇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롤스의 원초적 상황은 그야말로 허구의 상황입니다. 따라서 사실명제로 보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지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합의를 통해서 나온 것을 정의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합의를 하기에 공정한 입장이라고 가상적으로 상정한 상황속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원칙에 합의하겠는가를 물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장치입니다.
'자유주의'라는 명칭은 원조 신자유주의인 홉하우스(사회주의적 자유주의)도 "자유주의"라는 말로 책을 쓰고, 하이에크와 가까운 미제스도 "자유주의"라는 말로 책을 썼지요. 롤스도 자신의 책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말로 책을 썼습니다. 그 이름이 누구에게 더 어울리냐의 문제는 따져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우리나라에서 통상적으로 쓰는대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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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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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예크의 1976년도 저작 '법, 입법, 자유II-사회적 정의의 환상' 번역본에서 관련 구절을 찾았습니다.
번역본 261 쪽, '가장 낮은 소득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위치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위치를 개선하는 데 최대로 기여했던 사실은 바로 일반적인 부의 성장이었는데'
위 인용구절은 하예크가 자유시장이 최소극대화를 이뤄낸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하예크는 절대적인 수치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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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아하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찾아봐야겠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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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1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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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사실 명제를 과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명제로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 사용과 크게 다릅니다. 사실 명제는 근본적으로 과학적 명제일 따름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형이상학은 사실명제가 아니라 선험 명제를 다룹니다. 뿐만 아니라, 선험 명제를 다루는 분야를 다 형이상학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철학적' 명제일 뿐이죠. 롤스의 이론이 철학적인 만큼,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도 철학적일 뿐입니다. 롤스의 이론이 이성적 인간을 전제하고 그 전제에서부터 그의 사회계약론을 전개하듯,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는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전제에서부터 전개된 하예크의 철학적 결론입니다. 즉, 롤스 이론은 규범적이고, 하예크 이론은 사실적이란 님의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는 구체적 사실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하예크의 사고실험 장치의 결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애초에 롤스의 원초적 입장과 같은 범주에서 비교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비교하려면, 하예크의 보편성 테스트(법, 입법,자유II 7장에서 제시됨)가 롤스의 원초적 입장에 해당하지요.
또한 신자유주의란 말을 쓰신 데에도 드러나듯이 홉하우스는 자기 책 이름을 자유주의라고 지었지만, 자기 사상을 liberal socialism 이라고 칭했고, 원래의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것(수정주의)임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하예크나 미제스의 사상을 타인들이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듯이 이들은 자신이 원래 자유주의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의식했고 타인들도 그렇게 인식했습니다. 그러므로 홉하우스나 롤스 등의 사상을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하예크의 사상을 자유주의가 아닌 하예크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짝퉁(가치평가의 의미는 없습니다.)이 원조의 상호를 가로채는 경우나 다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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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명제는 사실(is)명제와 당위(ought)명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에 대한 명제이고,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명제입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명제나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모두 사실에 대한 명제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전자는 과학적 명제로 간주하지만, '신이 존재한다'거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과학적 명제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형이상학적 명제라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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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1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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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용어를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명제는 사실명제이면서 과학적 명제입니다.'신은 존재한다'는 사실명제이면서 형이상학의 정의에 따라 형이상학적 명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 아니라고 보는 바이지만, 어쨌든 님의 정의에 따라 형이상학 명제라고 보겠습니다. '1+1=2''같은 수학 명제나 'A>B, B>C => A>C' 같은 논리적, 분석적 명제를 님은 형이상학적 명제라고 봅니까? 아니면 과학적 명제라고 봅니까? 님이 수학이나 논리학을 일종의 과학이라고 본다면 롤스와 하예크의 이론들은 모두 과학(논리적) 명제와 형이상학 명제를 둘다 포함합니다. 롤스의 이론은 당위 명제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데, 시민의 이성(reasonableness)에 의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명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반성적 평형으로 질서 잡힌 사회의 척도를 도출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님의 정의에 따르면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도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는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 명제를 전제로 하여, 좋은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도출하는 목표에 봉사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좋은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확인하게 위해서는 당위 명제만으로는 모자라며, 이는 롤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예크의 자생적 질서가 '신이 존재한다'와 같은 종류의 형이상학적 명제(전 이것이 인식론적 명제라고 보지만)라면 롤스의 방법론에 필요한 이성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명제입니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경험적으로 어느 정도 확인 가능한 하예크의 전제에 비해서 롤스의 전제는 더욱 추상적이어서 경험적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굳이 사실 명제를 과학과 형이상학의 명제로 나눈다면 이성적 인간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롤스의 전제가 훨씬 더 형이상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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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하이에크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 위해 두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이에크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나요?
보통 자발성으로 번역하는 spontaneity는 주로 생기론자들이 쓰는 단어입니다. 기계론이나 유물론, 그리고 종교에 대한 하이에크의 견해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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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로 |
10-07-31 2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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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저도 하예크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제가 비교적 열심히 읽은 하예크의 책은 그의 규범적 논의를 집중적으로 담은 '법,입법,자유II-사회적 정의의 환상(사회정의라는 신기루)' 정도입니다. 님에게 반박한 것은 님의 하예크에 대한 이해가 이 책에서 하예크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논변들과 불일치하기 때문일 뿐이며, 하예크 사상 전반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가르칠만한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하예크를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실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가 직접 쓴 책의 내용과 불일치하는 오해는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만년에 쓰여진 그 책에서 하예크가 '자생적 질서'는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예크는 정치 규범의 판단 기준에서 칸트주의의 입장을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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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격, 자유, 평등, 행운, 분배, 능력, 사회주의, 자본주의, 이런 단어들이 기술하는 것들은 '파생적 가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들 파생적 가치 유효성의 척도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동물 진화와 생존에서 component가 되냐, 안 되느냐가 결정합니다.
위와같은, primary determinant를 간과한 미학적 혹은 인문학적 담론은 결국 사상누각에 불가합니다. 하지만, Rawls니Hayek (스왓치 시계 창업자?) 등의 주장이 primary determinant에 (associated with 인간동물 진화와 생존) 연결이 된다면, 당시엔 고려되어진 그런 담론이 되겠습니다.
2.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웁니다. 인간동물의 입장에서는 뻐꾸기는 자식을 키울 자격이 없지만, 진화적 관점으로 보면, 뻐꾸기는 아무 문제가 없단 말입니다.
덛댄다면, Rawls의 평등이니 기회균등의 원칙등은, 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 존재를 인정한 결과가, 그 것을 인정 하는 집단이, 인정 '안'하는 다른 집단보다 진화론적으로 gene proliferation이 잘된다면을 가정하고 주장된 것 들일 뿐입니다. 무력과 (자위력과?), 자원이 뒷받침된 미국에서나 적용이 어느정도 될 만한 가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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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medes//
하이에크는 문화의 진화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이에크는 문화진화를 보이지 않는 손과 집단선택을 통해 설명합니다만 그것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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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의 정확한 입장을 묻는 것이라면 하이에크는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그에 관하여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고, 종교에 관한 것도 명확하지 않으나 유물론에 관한 것은 비판을 하고 있지요.
하이에크의 롤즈에 관한 언급은 롤즈와 나의 차이는 하이에크가 생각하기에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특정한 시스템이나 소망된 물건들의 분배를 정의로운 것이라고 선택하는 과제는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으로서 포기되어야만 하고 또 그것은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저자와는 다툴 여지를 가지고 있지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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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에 대해 하나 더 질문해도 될까요? 하이에크는 소유권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예를 들면, 철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libertarian으로 간주되는 노직은 소유권을 신체에 대한 권리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당하게 번 것에 대해서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세금으로 떼어가는 것을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하이에크가 동의하는지요.
유럽의 무정부주의적 libertarian과는 달리 미국의 libertarian은 소유권의 보장을 개인의 자유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유명한 libertarian manifesto를 쓴 로스버드의 소유권에 대한 입장입니다. 노직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In a traditionally libertarian manner, Rothbard grounds property rights in what he calls two "fundamental premises": "(a) the absolute property right of each individual in his own person, his own body; this may be called the right of self-ownership; and (b) the absolute right in the material property of the person who first finds an unused material resource and then in some way occupies or transforms that resource by the use of his personal energy. This might be called the homestead principle..."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C8XhCMiPlOMJ:www.wendymcelroy.com/rockwell/mcelroy000706.html+rothbard+%26+%22property+right%22&cd=4&hl=ko&ct=clnk&g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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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celsus//
님이 제 질문에 대답을 주셨네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님이 링크한 문서에 아래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얼마나 큰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정부의 조치가 특정한 형식적 요건을 충족시켰는지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조치의 범위가 아니라 조치의 성격이다. 세금 자체와 세금의 절대적인 수준은 하이에크에서 문제가 아니다. 군복무와 마찬가지로 만일 세금이 적어도 예측가능하다면, 그것의 강제적인 성격은 상실한다."
그렇다면 하이에크의 입장과 libertarian의 입장과는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최소국가의 입장도 libertarian의 입장에서 핵심적인 것중의 하나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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