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의 강용석과 김미화에 대한 반응을 통한 심리분석
한여름 밤의 나이트 메어; 한국민은 폭압적 강권의 폭압 지배에 의한 희열을 원하는가?
최근 공교롭게도 유명인의 발언이 언론을 타면서 뭇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의원의 발언이야 어디까지나 사적인 술자리에서 성과 관련된 그의 세상인식을 보여준 발언이었고, 이를 언론 보도화 한 언론이야 말로 명예훼손 등의 논란에 부쳐질 만한 피해를 강의원이 보게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 판례에 의해 언론의 보도 자유라는 보다 큰 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넘어가게 될 것이다.
곧 이 건에 있어 피해자는 강의원이고 이렇게 하나의 약한 개인으로 된 사태에 있어 한국의 뭇 대중들은, 특히 소위 진보들은 약자를 마구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지겹고도 지겨운 도덕 가치를 들고 오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저질스런 반푼어치의 시각에 머무는 낡고 편협한 이성으로, 무뢰한 같은 작태를 한국의 소위 진보들은 특히 그대로 저지르는 것이다. 기실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로써 구속받고 몽둥이로 얻어맞던, 그 몽둥이로 작용하던 것이 바로 숨막히는 도덕가치와 딱딱한 소위 이성이란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김미화의 건에 있어서는 뭇 법률 전문가들 모두 kbs에 대한 김미화의 명예훼손을 넘어선 무고에 까지 부쳐질 사안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피해자, 약자는 kbs이지 김미화가 아니다. 김미화는 애초에 가해자 이고, 여기에 피해를 입은 kbs측에서 이에 대한 보호와 손해배상을 공권력에 요청한 것이다. 예전 김민선씨나 미네르바 사태 때와 같이 개인 미디어 시대에 (개인이 미디어 처럼 발언전파력이 증대된 시대에) 미디어라는 도구의 힘을 이용하여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해 내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강의원의 사례와 김미화씨의 사례에 있어, 미디어에 의한 피해는 매스미디어이냐 개인미디어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미디어에 의한, 곧 미디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구에 의한 피해인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른 것으로 강의원은 피해자가 되었고, 김미화씨는 가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혹은 너무나 자연스런 예측에 의해) 한국 대중들은 강의원을 변태 취급하여 인민재판처럼 몰아붙히고 아무 관계 없는 의원직 박탈까지 거론하는, 법적근거도 부재한, 또다시 무법천지로 까지 양산하려는 언행을 보이고 있고, 김미화라는 가해자에 있어서는 오히려 피해자라는 식의 정반대의 옹호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무책임은 민주주의와 반대말이다. 자유와 반대말이며 자유와 방종은 하등의 관련이 없다. 김미화씨의 발언은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무고까지 될 수 있는 왜곡일 수 있는 가해의 언사이다. 남을 가해하는 것은 방종이고 자유와 관련이 없다.
사적인 술자리에서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에 국한된 것이다. 이렇게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건드린 사람이야 말로 정치적 스탠스와 사상의 차이를 떠나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휴매니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자이다. 이런 부분을 건드리며 도덕잣대와 이성으로 재단질 하는 자는 경찰국가, 야경국가 모든 사적인 행동, 섹스까지도 감시하는, 소설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한다. 누가 결국 같이 수치스러운 유교문명권 아니랄까봐 오럴섹스를 범죄시 하는 싱가포르나 한국의 이러한 부분까지 인민대중의 재판장으로 끌고들어오는 모습, 이러한 가장 기본적 인성을 잃은 한국의 소위 진보대중이나, 한여름 밤의 나이트 메어를 눈앞에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최근 밤잠을 설치는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대중들은 스스로가 그토록 폭압당하여 나자빠지고 옭아메어져 질식하고 내팽겨쳐짐을 당하는 도덕구조와 이성을 외려 더욱 옹호하고 이를 또다른 약자에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일까? 왜 이들의 감성은, 이러한 것을 사용할 대상을 찾지 못해 감성을 날카롭게 갈고 닦으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날카로운 감성의 안테나를 돌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잘못된 구조, 틀인 줄 알면서도 이를 스스로 부정하며 더욱 이 잘못된 구조와 틀에 복속함을 외면하고 스스로 부정 무시하고 도망가며 복속을 하는 것일까? 마치 거대한 악마의 커다란 검은 품에 다이빙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마치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고 마는 일부 여성들과, 반항도 좀 하다 결국 더욱 강권적 폭압에 발리고 내팽겨쳐지고 정복당함으로써 가장 큰 쾌감과, 그 강한 힘을 가진 대상과의 일치를 통한 희열과 쾌감을 맞보는 취향과 닮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가치, 사고구조를 오히려 붙잡고 자기자신을 탓함으로써 머물러 있고자 하는, 그 좁고 낡고 질식적인 이성적 사고의 틀에 머물고자 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한국의 매맞는 아내- 뭇 약자-들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편협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좁은 파괴적인 이성적 세계관을 버리는 순간 혼자 떨어져 나와 두려움(이 두려움도 바로 그 특정 이성적 사고구조를 만든 자가 만들었을 경우가 대부분이다)의 세계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세상을 그 이성적 잣대로 판단해서 보며 똑같이 약자가 보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강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여성들이 종이학을 접듯 순수한 마음(?)으로 체현하여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그 강자들이 도구적으로 만든 사고구조를 때에 따라 변통으로 조작하여 지키지 않으면 마치 피해를 입은 종이학 접던 소녀들처럼 배신당했다며 피해자와 약자를 자처하며 징징대며 약자로써 쓰러져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아가씨로 남아있으려는 것은 다른 말로 독립하지 않고 두렵고 어둡고 추운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묵묵히 자신의 마음 속 중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사나이의 독립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려는, 대자연의 거친 질서에 영으로 환원되어 사라져버리는, 암흑의 역사의, 순환적 동양역사의 저열한 퇴폐, 퇴보 유전자를 발작시키는 행위 다름 아니다.
한국 문화가 가치를 두는 부분은 바로 이렇게 하나의 이성적 가치를 두고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며 거기서 엇나가는 사람은 그 강고한 단결된 힘에 의해 분쇄 당하는 것, 바로 이러한 기제는 학교라는 장에서 그리고 학생들이 체화한 그 행태에서 보여지는 양태이며, 또 무조건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는 권력자에 일단 복종하라는 가치가 지배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단시간의 정신적 웰빙상태를 맛보는 것이 좋은 정신상태인 것으로 칭찬받는 기제임으로 자연스런 것이라 하겠다.
폭압적 강권에 지배당하고 정복당하고 일부가 됨으로써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희열감이라는 쾌감은 전근대적 무지몽매 암흑의 순환역사를 사는 대중들의 전형적인 태도, 습태인 것이다. 인간이 인생에 있어 주변환경에 있어 어떠한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삶은 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최근 또다시 학교에서 철밥그릇 교사들과 부패한 카르텔에 의한 폭력사건이 시장의 논리에 의해 트렌드처럼 보도되고 있다. 역시 세상을 바꾸는 가장 원동력이 되는 것은 마켓의 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폭적으로 개방된 시장의 힘이다. 이렇게 더러운 대중의 정서적 취향도 개방된 시장의 물결에 의해 전반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승화되어 쓰일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마치 동물의 분뇨가 마구 뒤섞인 고비사막의 황사가 바람을 타고 날라가 다른 지역 토양에 양분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듯 말이다. 그 더러운 황사가 너무 더럽지도, 너무 많지도 않아, 개방된 시장의 좋은 물결이 침몰 익사하여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되지 않길 기도하는 마음이다. 너무 많은 너무 더러운 황사가 개방된 창공이라는 것을 편승하여 와, 되려 않좋은 것이 되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암흑의 대륙의 황사가 조선반도를 침습하여 덮어눌러버리는 역사는 언제나 끝이 나고 참신한 해양의 역풍이 불어와 사회 곳곳의 퇴폐 퇴보 정신의 헤묵은 먼지를 날리고 청신한 공기로 들어찰지, 텁텁한 날씨에 더욱 시원한 8월말의 환절 소나기와 9월의 높은 하늘이 그리운 철이다.